건축사도 결국
건축주가 되면
같은 고민을 합니다
도면을 그리는 사람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입장이 되었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건축사로서 수많은 집을 설계해왔습니다.
하지만 막상 내 집을 짓는 과정은 전혀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도면을 그리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결정을 내려야 하는 건축주의 입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이 있습니다.
집은 설계가 아니라 의사결정으로 만들어진다.
우리 집 설계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아내의 의견을 충분히 듣는 것이었습니다.
조명 하나, 벽지 하나, 바닥재 하나. 주방 아일랜드 크기, 싱크대 상판 색상까지. 집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들을 하나씩 함께 결정해 나갔습니다.
신기하게도 큰 충돌은 거의 없었습니다.
결정하기 전에 충분히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오랫동안 내가 설계한 집들을 곁에서 지켜봐 왔습니다. 현장을 함께 다니고, 완공된 집을 둘러보고, 건축주의 반응을 함께 들었습니다.
그 시간이 쌓이면서 아내는 건축주로서 남다른 감각을 갖게 됐습니다. 평면도를 보면 어떤 공간이 만들어질지 머릿속에 그릴 수 있고, 마감재를 보면 완성됐을 때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게 됐습니다.
거기에 아내 본래의 예술적 감각이 더해졌습니다. 그림을 좋아하고, 색과 질감에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감각이 우리 집 곳곳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습니다.
좋은 집은 건축사 혼자 만들지 않습니다. 함께 사는 사람의 눈이 공간을 완성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가 타일 매장 방문이었습니다. 보통 타일을 고르는 데 몇 시간씩 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장에 들어가서 10분 만에 타일을 고르고 나왔습니다.
제가 이 일을 몇십 년 했는데, 이렇게 빨리 고르고 나가는 분들은 처음 봅니다.
건축 경험이 있었던 것도 이유였지만, 사실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매장에 가기 전에 이미 둘이 취향을 맞춰 놓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색이 좋은지, 어떤 질감을 원하는지, 무엇을 피하고 싶은지. 그것을 미리 이야기해두면 선택의 순간이 놀라울 만큼 빨라집니다.
요즘은 공간마다 조명 색온도를 다르게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 집은 대부분의 조명을 하나의 톤으로 맞췄습니다. 집 전체의 분위기를 차분하게 통일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예외가 하나 있습니다. 아이방입니다. 책을 읽고 공부하는 공간이라 다른 공간보다 조명을 조금 더 밝게 계획했습니다.
작은 기준 하나를 정해두면, 나머지 선택들이 훨씬 쉬워집니다.
공간 구조에서 가장 많이 고민한 것은 중정이었습니다. 우리 집은 복도를 기준으로 두 개의 외부 공간이 있습니다. 바깥쪽 중정과, 안쪽 중정 겸 마당입니다.
두 공간의 성격이 서로 달랐으면 했습니다. 그래서 바깥쪽 중정은 조용하고 시각적인 공간으로, 안쪽 마당은 활동적인 공간으로 계획했습니다.
단순히 마당을 하나 만드는 것과, 그 마당을 어떻게 쓸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아내는 그림을 좋아합니다. 자연스럽게 그림을 걸어둘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은 복도 공간을 의도적으로 넓게 계획했습니다. 아파트처럼 동선을 짧고 효율적으로 만드는 대신, 조금 돌아가더라도 공간이 이어지는 흐름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비효율적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살아보니 전혀 달랐습니다.
동선이 길어지면서 집에 깊이감이 생겼습니다. 현관에서 거실까지, 거실에서 안방까지 — 한눈에 다 보이지 않고 공간이 조금씩 열리는 느낌이 생겼습니다. 복도에 걸린 그림들이 그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효율적인 동선이 꼭 좋은 집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조금 돌아가는 길이 공간에 리듬을 만듭니다.
처음 설계에는 다락 공간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할 공간이기도 했고, 건축적으로도 재미있는 요소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예산 때문에 포기해야 했습니다.
설계에서는 가능한 것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예산이 언제나 중요한 변수입니다. 지금도 그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포기한다는 것은 다른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당을 캠핑장처럼 만들고 싶었습니다. 캠핑카를 마당 안까지 끌고 들어올 수 있게 하고 싶었습니다. 문제는 공간이었습니다.
결국 건물의 폭을 줄이는 선택을 했습니다. 건물 폭을 포기한 대신, 캠핑카가 진입할 수 있는 동선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장점이 생겼습니다. 주차 공간이 늘어났습니다.
무언가를 줄였을 때 다른 무언가가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설계에서 그런 순간이 꽤 즐겁습니다.
지금도 가장 만족하는 결정 중 하나입니다.
아이방과 안방을 의도적으로 떨어뜨려 배치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생활 패턴이 달라질 것을 생각했습니다. 부모 공간과 아이 공간을 조금 분리해두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살아보니 이 선택이 얼마나 잘 된 결정이었는지 매일 실감합니다.
2층에 가족실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여가 공간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살면서 느낀 것은, 이 공간이 집 안의 생활 리듬을 자연스럽게 나눠준다는 것이었습니다. 1층 거실과 2층 가족실. 부모와 아이들이 같은 집에 있으면서도 각자의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습니다.
공간이 관계를 만든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처음 계획에는 손님방이 있었습니다. 설계를 진행하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재택근무, 공부, 작업을 위한 독립된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결국 손님방을 서재방으로 바꾸었습니다. 지금은 이 공간이 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 중 하나가 됐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면, 어떤 공간이 필요한지가 자연스럽게 결정됩니다.
집을 설계하면서 느낀 것은,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타일 하나, 조명 하나, 방 하나. 이 작은 결정들이 모여 결국 한 채의 집이 됩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주장하느냐가 아니라 서로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입니다. 집은 건축사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집에서 살아갈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공간입니다.